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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요재공>서운관부정요재공전(書雲觀副正樂齋公傳)
서운관부정요재공전(書雲觀副正樂齋公傳) 公諱瑛字英玉號樂齋淳昌郡人父元吉仕 高麗恭愍王檢校門下侍中 洪武己巳與鄭公夢周偰公長壽共立恭讓王有功官三重大匡輔國玉川府院君時我 太祖大王威德日盛天命人心已有所歸乃退居郡之金据里自號農隱與圃牧陶冶四隱相追逐切磋累徵不就有四子公其長也將姙母金氏忽夢一姥嫗手白璧一雙白花一枝自天來歸故名曰瑛及長容貌氣度允協厥祥有大人君子之風性又儒雅勤儉服父訓師古道遊於一世諸賢通經篤行不求聞達惟以善父母和兄弟自勉衆嘖嘖稱之有以薦者授書雲觀副正時事已非不仕南歸極山水之樂聖朝革命益無世念我 太宗大王徵以吏曹判書 世子師傅 召命前後狎至並不起補外慶尚伯公自備食不行公事時其弟虔谷公瑜亦爲麗氏守節再居廬 世宗大王除漢城判尹不就終身稱前朝副正 太宗下敎美之曰父子三賢每月白風清自悼身世携一童子琴榼陟家後最高峯頂一彈一酌以自慰有時北望松京歌曰白雲知我心靑山如故人欲説亡國恨雲山黙似噸後人因名其峯曰停琴峯又有近軆二律歌夷齊田橫古事以示意者一傳一逸其清風大節斯可見矣有二子龜山司正斐生員越松外史黃胤錫贊曰昔史遷傳夷齊稱其得夫子而名益彰豈不信哉盖當麗國之季卓卓不貳之節古已記之矣若公一家忠賢亦庶乎三仁而玉川公之記在徐氏勝覽虔谷公亦然况近者我雲樓先生爲虔谷表章以來雷淵南文清有容又從而徵之則虔谷聲名昉得日月爭光矣惟公子孫文獻之傳僅一牋止耳年代既遠邱墓亦失蕝巾衍所記又無以早吿于大賢之門者墨陳紙故明滅於殘螢走蠹之間吁其悲矣公評在人人心不死乃有若余者秉彝所同猶能以雲樓老門生喜談四百年放失舊聞矣始摭郡誌家譜繼先師書之以補其漏尚熊熊白虹生黃壤動人也 越松 黃胤錫 撰 翊贊頤菴 서운관부정요재공전(書雲觀副正樂齋公傳) 공의 휘는 영(瑛) 호는 요재(樂齋)이니 순창군 사람이다. 아버지 원길은 고려 공양왕 때 검교문하시중을 지내고, 홍무(洪武) 기사년(一三八九)에 정몽주, 설상수 공들과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여 공을 세워 벼슬이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옥천부원군에 올랐다. 그때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위덕 날로 높아져 천명(天命)과 인심이 이미 쏠리는 것을 보고는 이에 순창군 금굴리(金掘里)에 은거하여 호를 농은이라 하고 포은·목은·도은(陶隱)·야은(冶隱)과 함께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공은 큰 아들이다. 공을 잉태할 때 어머니 김씨(金氏)가 갑자기 꿈에 한 노파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손으로 흰 구슬 한 쌍과, 흰 꽃 한 가지를 주고 돌아갔기 때문에 이름을 영이라 하였다. 자라자 용모와 기개가 뛰어나 상서(祥瑞)롭고, 대인 군자의 풍모가 있었다. 또 성품이 유아(儒雅) 근검하여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르고 옛 도(道)를 스승으로 삼았다. 당시의 훌륭한 제현과 종유하면서 경서에서 통달하고 행실이 독실하였으며,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부모에게 잘하고 형제와 화목하기만을 힘썼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자꾸 칭도하면서 천거하여 서운관 부정에 제수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시사(時事)가 글러서 벼슬하지 않고, 남쪽으로 돌아와 산수 구경의 즐거움을 다하였다. 조선이 들어서자 더욱 세상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 태종대왕(太宗大王)이 이조 판서(吏曹判書) 세자사부(世子師傅)로 부르는 명이 여러 차례 이르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또 경상도 방백(方伯) 감사(監司)에 임명하였으나, 공은 스스로 생활하고, 공사(公事)를 행하지 않았다. 이때 그의 동생 건곡공 유(瑜) 역시 고려를 위해 수절하면서 두 번 시묘하고 있었는데, 세종대왕(世宗大王)이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마치니, 전조(前朝) 부정이라 칭하였다. 태종이 하교하여 아름답게 여겨 「부자 삼현(父子三賢)」이라 하였다. 매양 달 밝고 바람이 맑은 날이면 스스로 나라 잃은 슬픔 때문에 동자(童子)에게 거문고와 음식을 지워 집 뒤의 제일 높은 산 봉우리에 올라가 노래 한 곡조에 술 한 잔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때로는 북쪽으로 송경(松京:개성)을 바라보면서, 저 흰 구름은 내 마음을 알꺼나 百雲知我心 청산만이 고인과 같구나. 靑山如故人 망국의 한 말하고자 하니 欲説亡國恨 구름낀 산 말없이 찡그리는 것 같구나 雲山黙似噸 하는 시를 지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봉우리를 정금봉(停琴峯)이라 불렀다. 또 근 체시(近體詩) 두 수가 있어 백이숙제(伯夷叔齊)와 전횡(田橫)의 고사를 읊어 뜻을 보 였는데 한 수는 전하고 한 수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니 공의 청풍대절(清風大節)을 여 기에서 볼 수 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귀산(龜山)은 사정(司正)이요, 비(斐)는 생원이다. 월송외사(越松外史) 황윤석(黃胤錫)이 찬(贊)하기를,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백이숙제의 전(傳)이 공자의 기림을 받아 더욱 드러났다’고 한 것이 어찌 미덥지 않은가? 고려 말기를 당하여 탁월하게 두 마음을 품자 않은 절개는 옛날에 이미 기록하였는데, 공의 한 집안 충현(忠賢) 역시 삼인(三仁) 이 가깝다 하겠다.” 옥천공(玉川公)의 기록은 서거정(徐居正)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고, 건곡공(虔谷公)의 기록 역시 그렇다. 더군다나, 근래에 우리 운루선생(雲樓先生)께서, 건곡공을 위하여 표장(表章)한 이래, 뇌연(雷淵) 문청공(文清公) 남유용(南有容)이 거기에 따라 증거했으니, 건곡공의 명성은 해와 달처럼 환히 빛나게 되었다. 다만 공의 자손에게 전해 내려오는 문헌이 한 장에 불과하고, 연대 역시 멀며, 묘소 역시 실전되었으며, 기록한 문자도 없어 일찍이 대현(大賢)의 문하에 알리어 받은 글도 먹이 달고 종이가 낡아 좀이 슬어 없어졌으니, 슬픈 일이다. 공평한 평론은 사람들에게 달려 있고, 인심이 죽지 않았으니, 나와 같이 생각한 자가 있을 것이며, 사람의 떳떳한 도리는 같아서 비로소 군지(郡誌)와 가보(家譜)를 참고하고 선사(先師)께서 쓴 것을 이어 거기에 빠진 것을 보충하니, 그 광채가 흰 무지개처럼 빛나 황양(黃壤)이 생생한 것 같다. 월송(越松) 황윤석(黃胤錫) 지음 註:전횡(田橫):진말(秦末), 하, 한초(漢初)때 사람. 제왕(齊王) 전영(田嬰)의 아우. 한신(韓信)이 제왕 광(廣)을 사로잡자 그는 부하 五백여명과 섬으로 피해 갔다가 뒤에 한 고조가 부르자 신하되기를 거부하고 자살하여, 부하들도 전부 따라 죽었다. 비간(比干):은(殷)대의 사람. 주왕(紂王)의 숙부. 조카의 악정을 간하다. 피살된 삼인(三仁)의 한 사람 미자(微子):은(殷)시대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주왕의 악정을 여러 차례 간했으나 듣지 않자 나라를 떠나 버렸음. 황윤석(黃胤錫 一七二九∼一七九一):언어학자, 본관은 평해(平海), 一七五九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一七六六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익찬(翊贊)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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